미술작품이 가치를 가질 때는 관객과의 소통을 이룬 시점부터라고 할 수 있다. 사회운동가이자 화가인 아스거 욘(Asger Jorn 1914~1973 덴마크)은 <침묵의 신화>에서 ‘예술작품의 가치는 보는 이에 달려 있다. 작품은 관객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힘보다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다.’고 했다. ‘한밤중, 주위에 아무도 보는 사람 없이 갤러리에 그림이 걸려 있을 때, 그럴 때도 그것을 미술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무언가를 보는 눈이 없다면 시각도 존재하지 않는다. 미술은 그러므로 관찰될 때에만 일어나는 일이다.’(요한 이데마) 이는 미술이라는 사건이 발생한 시점의 서술이다. ‘감상은 작품에 마음을 주는 일’이라고 <원포인트 그림감상>의 저자 정민영은 썼다. 더군다나 그림이 관객의 영적인 힘에 영향을 끼쳤다면, 어느 누구도 그림의 가치에 대해 회의감을 품지 못할 것이다.
감동은 영적 울림이다. 감탄이 아닌 감동으로의 여행이. 미술품이 영적인 힘에 영향을 끼친 예는 많다. 램브란트의 작품 <유대인 신부>(The Jewish Bride, 122x167cm 1665-67, 암스테르담국립미술관)는 유명 화가들조차 찬사를 아끼지 않은 작품이다. 후배 화가 고흐는 “이 그림 앞에 앉아 2주를 더 보낼 수 있게 해준다면 내 수명에서 10년이라도 떼어 주겠다.”고 했다. 미술관에 더 머무를 수 없는 아쉬움을 이렇게 토로한 것이다. 일종의 ‘스탕달신드롬’ 증세다. 스탕달신드롬이란 걸작품을 보고 갑자기 흥분상태에 빠지거나 호흡곤란, 우울증, 현기증, 전신마비 등의 이상증세를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문호(文豪) 스탕달은 「나폴리와 피렌체-밀라노에서 레조까지의 여행의 기록」에서 “산타크로체 교회를 떠나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생명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걷는 동안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4세기에 활약했던 이탈리아 화가 지오토(Giotto)의 프레스코화를 보고 난 후의 일이다. 이러한 증상에 대해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신과 의사 그라치엘라 마게리니가 1979년, 이렇게 이름 붙였다.
이런 정도의 걸작품을 우리 주변에서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감상 수준은 밋밋한 일상에 살짝 자극을 받는 정도거나, 색다른 기분의 전환, 혹은 그런 기회를 포착하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일단 전시장이나 갤러리에 들어서는 순간, 패스트 삶에서 슬로우 삶으로의 변환이 부지불식간에 깃든다. 인터넷 주문 대신 서점에서 직접 책을 고르는 행위와 같은 것이다. 서점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을 잊고 다른 책으로의 여행까지 즐기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책을 고르고, 페이지를 넘기는 것처럼 천천히 그림을 보며, 생각을 움직이게 하는 힘. 걸음을 멈추고 집중해 관찰하는 습관이야말로 슬로우 감상의 지름길인 것이다.
작품을 볼 때, 부분보다는 전체의 느낌부터 살피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첫인상으로부터 대화의 물꼬가 트이는 법이니까. 그리고 차차 마음 속으로 질문을 던져본다. 작가는 어째서 이 색을 썼을까? 작가는 왜 이렇게 붓질을 했을까? 작가는 어떤 계기로 이런 주제, 소재를 택했을까? 작가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주려는 걸까? 등등. 그리곤 하나의 결론을 맺는다. ‘좋다.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이 작품이 좋다.’
연암 박지원(1737~1805)은 “감상할 줄은 모르고 단지 수장만 하는 자는 부유하지만 그 귀만 믿는 자이고, 감상은 잘 하되 수장을 못하는 자는 가난하지만 그 안목을 저버리지 않는 자이다.”라고 했다. 수장에 앞선 감상의 능력을 높이 산 말이다. 유한준(17832~1811) 역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짚었다. 보고 즐기다 보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 후에는 처음의 자신이 아닌 것이다. 서양의 경우에도 허영심만 앞세운 부류들이 많았던가 보다. 모파상(1850~1893)은 장편소설 『벨아미』에서 당시 미술에 대한 지식 없이 미술품만을 수집하는 부유층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맹자는 ‘흐르는 물은 웅덩이 하나하나를 다 채우지 않고서는 나아가지 않는다.’(流水之为物也,不盈科不行)고 했다. 미술감상 역시 삶을 고양하는 다양한 방법 중의 하나지만, 물이 웅덩이를 다 채우지 않고서는 흘러가지 않듯 그 하나가 채워지지 않으면 다른 하나도 채워지지 못한다는 것을 유념했으면 싶다. 한 웅덩이에서 넘친 물이 다른 웅덩이로 넘어가듯, 처음의 웅덩이로부터 모든 웅덩이들이 채워지게 된다면 이것이야말로 교양과 지성이 넘치는 삶의 흐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